얼마 전에 라디오 방송국의 요청으로 후배 아빠들을 위한 독서 육아 자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어떤 아빠가 이렇게 묻더군요.
“아이에게 책을 잘 읽어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가장 흔히 받는 질문입니다만,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조금스럽기도 합니다. 과연 어떻게 해야 “책 잘 읽어주네”라고 할 수 있을까? 시중에 넘쳐나는 육아서나 독서 전문가들은 각자 나름의 경험에 따라 이런저런 요령을 알려 줍니다. 기계적으로 읽지 말고 운율에 따라 읽어라, 속도는 천천히, 중간중간에 즉흥적인 애드리브도 넣어서 아이들을 재미있게 해줘라, 아이에게 생각할 여유를 줘라 등등. 저 또한 예전에는 마치 바이블마냥 따라했던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은 백이면 백, 천이면 천 모두 다르죠.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제각각입니다. 아주 어릴 때부터 자연스레 책과 친숙한 아이가 있는가 하면, 도무지 책과는 친해지지 않는 아이도 있습니다. 기질이 얌전해 책을 읽어주는 내내 가만히 앉아서 집중하는 아이도 있고, 넘쳐나는 에너지를 주체하지 못해 잠시도 앉아 있지 못하는 아이도 있죠. 아이가 모두 다른 데 어느 한 가지로 “이것이 정답”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선 아빠들은 자신에 대한 눈높이를 낮출 필요가 있습니다. 너무 잘 하려고 하면 오히려 그게 부담이 되기도 합니다. 책 읽어주는 요령에 모범 답안은 없으며, 이것저것 신경 쓰지 말고 그냥 아빠가 편하게 읽어주는 것이 최고라는 사실.
유아기 아이들을 상대로 책을 읽어준다는 것이 생각처럼 쉬운 일은 아닙니다. 이 시기의 아이에게는 책은 지식 습득의 도구가 아니라 그냥 놀이의 하나에 불과합니다. 또한 산만한 아이에게 책 읽어 줄테니 가만히 앉아 있으라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누구 집 아이는 책을 좋아한다는데 우리 아이는 책을 멀리한다”면서 조급해 하기보다는 가랑비에 옷 젖듯이 서서히 독서습관을 만들어나가야 합니다.
처음에는 아빠의 서툰 모습에 아이가 “엄마보다 재미없어”라고 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읽어주고 또 읽어주다 보면 아이의 기질도 알게 되고 어떤 책을 좋아하는지, 어떻게 읽어줄 때 좋아하는지도 알게 돼 자연스레 나만의 스킬이 생기는 법입니다. 적고 보니 뻔한 얘기입니다만, 그럼에도 저더러 “요령을 가르쳐 주세요”라는 것은 아이들에게 잘 해보겠다는 열성 아빠들의 의욕이 그만큼 넘치기 때문이겠지요.
아빠가 책을 읽어주는 효과에 대해 어떤 연구에서는 “아빠가 책을 읽어주면 엄마가 읽어줄 때보다 아이의 지능과 사회성, 어휘력이 훨씬 발달하더라. 나중에 학교에 들어가서도 성적이 더 좋았다”라고 합니다. 그 이유가 엄마와는 차별화되는 남자 특유의 저음이나 책 읽어주는 방식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때문에 미국이나 유럽 선진국에서는 아빠의 책 읽어주기 열풍이 한창이라고 하죠.
저는 아빠 책 읽어주기 효과가 꼭 남녀의 성별 차이 때문이라기보다는 책을 읽어준다는 행위 자체가 아빠와 아이들의 거리를 좁혀주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빠가 가정에 충실하면 아이들은 아빠가 옆에 있고 아빠의 목소리에 익숙해집니다. 그것만으로도 서로의 애착심이 깊어지고 아이는 심리적 안정감을 느낍니다. 반대로 가부장적인 아버지들은 밖에서 돈을 벌어오는 것을 하나의 권력으로 여기고 집안에서 군림하면서 아내와 아이들에게만 모범을 보일 것을 요구합니다. 자신은 가족에게 무관심하면서 가족과의 벽이 생기면 아내 탓, 자녀 탓으로 돌리고 자신의 책임은 회피합니다.
하지만 자녀들은 늘 보는 엄마보다 오히려 가끔 보는 아빠에게 더 많은 악영향을 받습니다. 가령 아빠가 약속을 어기거나 함부로 욕을 하거나 TV만 본다거나 가정에서 제멋대로 행동하면 그런 아빠의 부정적인 모습을 보면서 아이들은 ‘어른은 원래 제 마음대로 하는 사람’이라고 인식합니다. 아빠의 양육 태도는 성장기 자녀들에게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 꼭 명심해야 하지 않을까요.
◇ 내용만 주입하지 말고 대화를 하라
책 읽어주기는 아빠가 아이들과 소통하는 최고의 수단입니다. 또한 책은 아이의 상상력과 창의성을 키워주는 도구입니다. 책을 읽어주는 데 모범 답안은 없지만 한 가지 명심할 것은 있습니다. 바로 상상력에는 정답이 없다는 사실이죠. 아이들은 온갖 질문을 던지고 또 책과는 상관없는 엉뚱한 얘기를 하기도 합니다. 한창 동화책을 읽고 있는데 느닷없이 생각났다는 듯 “오늘 유치원에서 말이야”라고 합니다. 그럴 때 아빠는 “그건 나중에 얘기하고 지금은 동화에 집중해”라고 아이의 말을 자르지 말고 “아 그렇구나”라면서 귀담아 들어줘야 합니다.
아빠는 책의 내용을 주입하기보다는 아이와 대화를 하려고 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 아빠들은 뼛속까지 주입식 교육에 익숙합니다. 뭐가 정답이고 뭐가 오답인지에도 익숙합니다. 우리는 바로 그렇게 배우고 자랐으니까요. 그렇다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 아이를 붙잡고 자꾸 뭔가를 가르치려 듭니다.
가령 동화책에 농사짓는 장면이 나오면 논과 밭의 차이가 무엇인지, 곰은 겨울에 왜 겨울잠을 자야 하는지, 열 명의 군사 중에서 다섯 명이 용에게 잡혀간 공주를 구하러 갔는데 남은 군사는 몇 명인지 등등. 뭐가 정답인지 아빠가 정해버리고 아이가 다른 대답을 한다고 틀렸다고 한다면 아이는 정해진 프레임에 갇힌 채 상상력이 더 이상 확장되지 못합니다. 또한 자꾸 틀렸다면서 핀잔을 듣다보면 점점 자신감이 사라져 나중에는 입을 다물지도 모릅니다. 아무리 아빠가 보기에는 좀 엉뚱하고 바보 같은 대답이라도 아이에게 “틀렸다”고 하지 말고 “우와, 그렇구나. 아빠는 몰랐는데”라고 말해줘야 합니다. 아빠의 칭찬은 아이의 자신감을 만들어 줍니다. 아이는 앞으로도 자기 생각을 남에게 표현하는 것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 책 내용으로 놀이를 하라
때로는 책에서 나오는 내용으로 놀이를 만들어 보세요. 가령 동화책에서 샌드위치가 나오면 “우리 오늘 점심은 샌드위치로 해볼까?”라고 말한 뒤, 함께 식빵에 햄과 치즈, 샐러드를 올리고 맛있게 먹어보세요. 아이는 그냥 동화책을 읽었을 때보다 훨씬 오랫동안 내용을 기억할 것입니다. 또는 그림자놀이, 손가락 인형, 손바닥에 물감을 묻혀서 신문지에 찍어보기, 냄비와 솥을 모두 꺼내어 국자로 신나게 두들겨 보기, 목욕탕에서 함께 목욕을 하면서 비눗방울 놀이를 해보거나 신문지를 둘둘 말아 방망이와 공을 만들어 야구 놀이를 해 볼 수도 있습니다. 아이들은 그냥 책을 읽을 때보다 아빠에게 훨씬 친근감을 느낄 수 있으며, 오감 또한 발달하게 됩니다.
요즘 독서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어떤 부모들은 100권 읽히기, 200권 읽히기 등 독서 목표량을 정하고 아주 어릴 때부터 맹목적인 독서를 강요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우리 사회 특유의 과도한 경쟁 심리가 독서 육아를 왜곡시키고 있는 것이죠. 하지만 책은 만병통치약이 아닙니다. 아이를 책에만 가둬 두기보다는 주말에는 다 같이 손잡고 가까운 공원에 산책을 나가세요. 함께 요리도 하고 마트에서 장도 보고 집안일도 돕고 저금통을 들고 은행 창구에 가서 저금도 해보는 등 일상생활에서의 다양한 체험과 경험이야말로 더 없이 중요합니다. 특히 유아가 아이들은 추상적인 개념이나 직접 보고 느끼고 경험해 보지 않은 것을 머리로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책이나 값비싼 홈스쿨링만으로는 배울 수 없는 것도 세상에는 많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 책읽기 외에 할 수 있는 초보 아빠를 위한 추천 놀이
- 볼링 놀이 : 거실에 빈 페트병을 볼링핀 처럼 세워놓고 공으로 찬다.
- 투호 놀이 : 빨대 앞부분에 고무찰흙을 붙인 후(앞이 무거워야 함) 쓰레기통에 던져서 누가 많이 넣는지 시합한다.
- 종이컵 쌓기 : 아이를 세워놓고 아이 주변에 종이컵을 블록처럼 지그재그로 쌓아올린다.
- 물감 찍기 : 목욕탕이나 큰 한지에 물감으로 손바닥 찍기 놀이를 한다.
- 악기 놀이 : 냄비, 그릇, 솥단지를 엎어놓고 채나 손바닥으로 두들긴다.
- 실로폰 놀이 : 빈 컵을 여러 개 일렬로 세워놓고 물을 서로 다른 높이로 부은 다음 젓가락으로 치면 즉석 실로폰이 된다.
- 과녁 놀이 : 한지에 과녁을 그리고 거실 유리창에 붙인다. 화장지를 물에 적셔서 돌돌 말아 던진다.
*칼럼니스트 권성욱은 울산 토박이이면서 공무원으로 13년째 근무 중이다. 36살 늦깎이 총각이 결혼하자마자 아빠가 되었고 집사람의 육아 휴직이 끝나자 과감하게 직장에 육아 휴직계를 던져 시한부 주부 아빠로서 정신없는 일 년을 보냈다. 현재 맞벌이 집사람과 함께 가사, 육아를 분담하며 고집 센 여섯 살 딸아이의 수발들기를 즐기고 있다. 인생에서 화목한 가정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좋은 남편, 좋은 아빠가 되려고 항상 노력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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